[메디게이트뉴스 조운 기자] 정부가 미국의 책임의료조직((Accountable Care Organization, ACO) 모델을 참고해 현 '행위별수가제'를 대체할 '묶음수가', '가치기반지불제' 도입을 구상하고 있는 데 대해 의사들의 부정적 인식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전 정부의 의료개혁을 주도해 온 '의료개혁특별위원회'에 의사단체가 포함되지 않았던 만큼 정부가 계속해서 의료계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은 채 일방적인 정책모형을 추진할 경우 제도 수용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13일 의료정책연구원 임선미 책임연구원이 최근 대한의사협회 계간의료정책포럼에 발표한 '주요국 진료비 지불제도 동향과 시사점: 정부 진료비 지불제도 개편방향의 문제점'에서 이같이 밝혔다.
정부 추진 '묶음수가·성과보상제'…의협 회원 "의료 질 향상·환자 치료 결과 개선 못해"
현재 우리나라 의료서비스 제공자에 대한 주요 진료비 지불방식은 '행위별수가제'로 의료인이 제공한 진료행위, 약재, 재료비 등 모든 투입자원에 대해 보상하는 방식이다.
물론 예외적으로 포괄수가제(DRG)가 적용되고 있고, 일부 병원에서는 신포괄수가제가 시범 적용되고 있으며, 요양병원은 일당정액제를 적용하는 혼합형태 방식이다.
이 가운데 윤석열 정부는 지난 2024년 2월 1일 필수의료 정책패키지와 8월 30일 의료개혁 1차 실행방안을 통해 대안형 지불제도로의 전환 계획을 밝혔다.
구체적으로 보건복지부는 묶음수가제, 성과보상제(가치기반지불제) 등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벤치마킹하려는 미국의 ACO는 의료제공자가 특정 인구 집단의 건강관리를 책임지고, 그에 대한 비용을 미리 정해진 금액으로 지급받는 방식이다.
ACO는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과정뿐 아니라 결과까지도 통제할 수 있도록 진료비 지불체계와 성과(질적, 재정적)를 연동해 의료체계를 개선하려는 작동기전을 가지고 있다.
이에 의정연은 대한의사협회 회원 DB에 등록되어 있는 전체 의사를 대상으로 진료비 지불제도 개편에 관한 설문조사를 실시해 최종 846명의 응답자에 대한 의견을 분석했다.
'주요국 진료비 지불제도 동향과 시사점: 정부 진료비 지불제도 개편방향의 문제점' 발췌
그 결과 응답자의 90.5%는 정부가 추진하는 지불제도 개편안이 의료의 질 향상이나 의료비 절감에 기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구체적으로 정부의 지불제도 개편방향에 대한 '의료 질 향상 측면'과 '환자 치료 결과 개선'에서 '전혀 기여 안함'이라는 응답이 각각 61.8%, 61.2%로 가장 많았으며, '다소 기여 안함'이 각각 18.9%, 18.4%으로 높게 나타나 전체적으로 부정적인 인식이 주를 이루었다.
또한 환자들이 느낄 수 있는 만족도 측면에서도 '매우 불만족'이 38.9%, '불만'이 27.5%로 부정적 인식이 주를 이루었고, 의료비 절감 측면에 대해서는 '전혀 동의 안함'이 51.4%, '다소 동의 안함'이 20.3%로 나타나, 개편안이 의료비 절감에 기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대다수임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이미 국내에서 성과보상지불제의 일환으로 고혈압·당뇨병에 만성질환 인센티브와 외래약제, 혈액 투석 등 일부 항목에 가감지급 사업을 시행하고 있는데 응답자 중 가감지급 사업을 인지하고 있었던 비율은 28.3%로 낮은 편이었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가감지급 사업에 대해 불만족스럽다(79.1%)는 의견이 높았다.
주요 불만족한 이유로 첫 번째는 '보상성과지표 집중으로 인한 환자 치료 왜곡 가능성'(56.1%)과 '성과지표 선정 및 평가의 적정성 문제'(26.5%)를 꼽았다.
이는 성과지표를 충족하기 위한 진료가 환자의 개별 치료 필요성보다 우선시 되거나, 지표가 실제 의료의 질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의정연은 정부가 미국의 책임의료조직 ACO 모델을 참고해 인구집단의 건강관리 성과와 보상을 연계하는 새로운 지불모델 시범사업 도입 계획을 밝힌 데 대한 국내 적용 가능 여부에 대한 설문도 진행했다.
응답자 중 절반 이상인 58.3%가 국내 도입이 불가능하다고 답했는데, 그 이유로는 '환자의 참여 및 협력 부족'(48.5%)과 '성과 및 효과에 대한 불확실성'(47.5%)을 골랐다.
묶음수가, 의료 질 저하·성과보상제, 위험환자 기피 가능성 커…"특수성 고려해 의료계와 논의해야"
의정연은 정부가 구상 중인 묶음지불제도와 성과보상제도가 과연 우리나라 의료체계에 적합한 진료비 지불제도 모형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임 책임연구원은 "묶음지불제도는 질병의 시작부터 치료까지를 포괄적으로 지불하는 방식으로 에피소드(episode) 단위 설정이 중요하다. 환자의 건강 상태, 중재 방법, 치료과정의 연관성 등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으면 환자와 의료서비스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재정적 인센티브로 인해 수술 후 합병증 위험이 높은 환자는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저위험 환자에 대한 과잉 진료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어 환자 선택에 미치는 장기적인 영향을 평가해야 한다"며 "이는 묶음지불제도가 질환의 중증도와 복합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으면 의료비 상승과 의료서비스 질 저하를 초래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우려했다.
또 임 책임연구원은 "성과보상제는 보충적 지불방식으로, 행위별수가제에 추가 비용을 지불해 의료서비스의 질을 높이려는 방식이다. 그러나 대부분 초기 성과가 개선된 후 효과가 지속되지 않는다는 보고들이 있으며, 성과 보고를 위한 행정부담과 위험환자 기피 가능성이 문제가 된다"고 밝혔다.
실제로 인구기반 지불제도의 대표적 유형인 미국의 ACO(책임의료조직)는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의료제공자들이 환자 그룹의 건강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이를 통해 절감된 의료비를 공유하는 것에 중점을 둔 모델이다.
그러나 선행연구에 따르면 병원을 기반으로 한 ACO의 경우 비용 절감의 효과가 미미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에 따라 다양한 기관의 연계와 다양한 유형의 ACO를 권장한 미국 정책 방향에도 수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임 책임연구원은 "미국의 다양한 시도와 결과를 우리도 주목할 필요는 있지만, 정부가 일방적으로 정책모형을 제시할 경우 의료인과 의료기관의 제도 수용성을 낮출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가치기반 지불모델은 표준화된 절차에서는 긍정적인 성과를 보이지만, 복잡하거나 중증 환자에게는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한계를 지닌다. 최근 국내 보건의료 정책에서 가치(Value)의 개념이 많이 활용되고 있지만, 가치는 주체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고 밝혔다.
예를 들어, 의료기관은 수익을 높이고 비용을 줄이는데 도움이 되는 의료기술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고, 의사는 환자를 보다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방법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으며, 환자는 장기 입원이 줄어들고 질병의 재발생률이 낮아지는 상황에서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반면, 정책입안자는 비용 대비 환자의 건강 결과를 가치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임 책임연구원은 "정부가 이번 의료개혁 실행방안에서 지불제도 개편을 발표했으나, 정확하지 못한 원인 분석, 불분명한 정책 방향, 그리고 명확하지 않은 재정 투입으로 인해 불신을 초래했다"며 "우리나라의 특수성을 반영한 신중하고 정교한 정책 설계를 위해 의료계와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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